가난한 사람이 1명도 없어도 복지국가가 필요할까?

복지국가
후생경제학
복지국가는 부의 재분배를 통해 사회 전체의 번영을 돕는다. 부자로부터 빈자로 소득 또는 재산을 이전시킨다.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의 재분배는 로빈 후드가, 한 사람의 노년기와 청년기 사이의 재분배는 돼지저금통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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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1 복지국가 = 로빈 후드 + 돼지저금통

한국사회는 복지국가의 쓸모를 묻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 사회다. 최저임금협상 테이블은 항상 뒤엎어지고, 나랏돈 부정수급 문제는 우리 서로를 감시자로 만들며, 국민연금은 제도개혁이 거듭될수록 세대 싸움을 부추긴다. 그렇다면 복지제도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제도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복지제도가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복지제도가 사회를 분열시키는지, 아닌지에 대한 음모론(?)은 생각보다 많이 연구되어 있다. 사실, 사회정책분야 연구의 큰 산 중 하나다. 내 핵심 연구주제도 넓게 보면 이 음모론 실증에 속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른 글에서 깊게 다룰 것이다.

복지국가같은 거창한 단어 대신 복지제도를 사용해서 문제를 좁혀보자. 얼추 윤곽이 잡힌다. 복지제도는 빈곤과 불평등 완화를 위해 2가지의 기능을 갖는다:

  • 로빈 후드 기능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들에게 소득과 부를 재분배한다. 로빈 후드나 홍길동은 나쁜 양반집, 소위 탐관오리집만 털었다. 복지국가는 그런 거 없다. 다 턴다. 필요하다면 가난한 사람도 턴다.

  • 돼지 저금통 기능
    부자인 나로부터 가난한 나에게 소득과 부를 재분배한다. 차량 구매를 위해 저축하는 사람은 봤지만, 혹시 모를 다리 골절을 대비해서 저축하는 사람은 못봤다.

2 부자도 돼지저금통이 필요하다.

늘 싸움이 일어나는 곳은 로빈 후드 기능이다. 여전히 우리는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 왜 세금을 내야하는가?” 같은 고루한 문제로 싸운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를까?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사람은 없을까? 시간 당 1억을 버는 사람이 하루 1시간만 일한다면, 게으른 사람일까? 가난은 능력에서 오는가? 이 문제도 능력주의문제와 함께 복지국가 연구의 거대한 한 축이다. 이쪽 분야 연구들의 핵심쟁점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능력주의에서 말하는 “능력”은 노력의 총량으로 보는 관점, 결과의 총량으로 보는 관점, 그것도 아니면 그냥 IQ 같은 지능지수로 보는 관점들이 뒤섞여 있는 모호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어쨋든, 지나친 빈곤과 불평등은 전체의 번영을 막는다는 것은 어느정도 합의를 이룬 명제다. 로빈 후드 기능은 이 명제에 의해 정당화된다.1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약 빈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다시 말해, 사회에 가난한 사람이 모두 없이, 용인할 수준 정도의 불평등만 약간 있다면 어떨까? 빈곤의 종말은 곧 복지국가의 종말인가?

그렇지 않다. 빈곤전쟁의 승리국도 여전히 돼지저금통 기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노후대비를 “내돈내산 저금통”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돼지 저금통 기능마저 필요 없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그렇게 “내돈내산”으로 다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스스로가:

  1. 언제 아플지(암, 심장, 뇌혈관 등),
  2. 언제 다칠지(자동차사고, 산재사고 등),
  3.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나 사기당할지,
  4. 회사가 나를 언제 자를지,
  5. 내가 언제 가난할지,

등의 시점과 손실수준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내돈내산 저금통”으로 완전히 충분하다. 다음 주 화요일에 다리 골절로 병원비 50만 원 지출이 정확히 예측된다면 오늘부터 미리 모으면 된다. 13년 후 내가 부자가 될 것임이 정확히 예측된다면 오늘 그다지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 또는 스릴을 즐기는 사람에게도 이런 삶은 나쁘지 않은(?) 삶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보험에 가입한다. 문제는, 이 보험은 위에 1~5에 대하여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은 그런 돼지 저금통을 안판다. 사기꾼이 잔뜩 남게 되고 보험료와 보험금에 수지타산이 안맞게 되어 결국 보험회사가 문을 닫는다. 사고, 상병, 실업 등을 생각해보자.

노후 은퇴문제는 조금 특수하다. 사고, 상병, 실업과는 다르게 언제 일어날 지는 아는 일이니까.2 그래서 이런 돼지 저금통은 시장에서 판매한다. 작동도 잘 한다. 그러나 어느 저금통이 잘 작동할지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3 일단 합의를 먼저 보고, 제도 최적화는 그 다음에.

다시 싸움 문제로 돌아와서, 어떤 싸움을 말하는 건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1. 정치규범적 갈등
    우리 사회는 아직 효율, 형평, 정의, 자유에 대해 합의가 끝나지 않았다. 이들 개념 간에 우선순위가 정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정치규범적 분배갈등이 현재진행형이다.

  2. 제도 최적화의 갈등
    제도의 최적화 작업을 둘러싼 싸움은 복지국가 자체를 축소시키려는 싸움이 아니다. 1의 싸움 끝에 합의된 바를 어떻게 더 잘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싸움이라기보다는 테크니컬한 논쟁이다.

한국사회는 이 두 싸움이 한데 뒤엉켜있다는 점이 문제다. 예를 들어, 후자는 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조절해서 인구문제에 최적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전자는 국민연금을 폰지사기라고 한다. 국민연금이 폰지사기인지 아닌지에 대한 합의가 먼저 있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또다른 예로, 동일노동-동일임금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최저임금제는 동문서답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얘기가 아직 안 끝났는데, 다시 말해 규범적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최저임금제라는 최적화를 시도한다.

한국 사회는 1의 문제를 해결하고 와야한다. 복지제도는 싸움을 부추긴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싸움의 부산물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한국 사회는 대화가 부족하다.

4 국가 복지는 최적의 돼지저금통

위에 언급한 몇몇 경우에 한해서 국가복지는 최적의 돼지저금통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의무는 첫째, 폭력과 침입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고, 둘째, 부정의와 억압으로부터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며, 셋째, 대규모 사회에는 매우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이나 소수에게는 그 비용을 부과할 수 없는 공공제도와 시설을 설립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Adam Smith, 1776

정치규범이 무엇을 결정하든, 몇 가지 영역에 대해서는 국가만큼 돼지저금통을 잘만드는 기구는 없다. 시장도 못한다. 중고차가 유독 잘 고장나는 것처럼, 내 주식이 늘 실패하는 것처럼, 시장이 잘 동작하기 위한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 보자면, 시장은 오히려 손이 많이 간다. 정보 볼완전성, 거래비용, 외부효과 등 돌볼 것이 많다. 시장통제를 위해 자연히, 그리고 자발적으로 주권적 국민국가가 탄생했다. 이런 점에서 외려 시장이 인위적이고 국가는 자연발생적이다. 20세기 헝가리의 위대한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통찰이다.

칼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에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태어났다.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다. 그리고 그는 1946년에 사망했는데, 도널드 트럼프가 바로 1946년생이다. 누가 이걸 소재로 다큐멘터리 하나 만들어주지 않을까.

Footnotes

  1. 물론, 방빈이 이렇게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2. 이제는 실업도 무조건 일어나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